● 서론

18세기의 중국은 ‘큰 시장’을 선점하려는 구미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이에 일본과 조선(남한)처럼 중국 역시도 강제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근대 체제로 편입된 이상 사회 진화론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이론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이 한계를 전통 사상의 저력을 활용하여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곳이 바로 중국이다.[각주:1]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자들의 저작을 검토하여 근현대 중국의 구미문화(서구문화) 수용 양상과 이 과정에서 보이는 중국 지식인들의 모습에 대해 서술하는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을 평가하고자 한다.

● 본론

1. 신해혁명 이전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

1.1. 양무운동의 시기 – 아편전쟁부터 청일전쟁까지

당시 청나라는 바깥으로는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을 겪으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사상적으로 “서양의 장점을 배워 서양 오랑캐를 견제 또는 제압한다”는 입장에서 부국과 강병을 위한 새로운 모색이 지식인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것이 바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인데, 이를 바탕으로 초기의 서학은 정치적 사고와 결합된 자연과학 지식에 국한되어 수용되었다.
그러나 중체서용이란 ‘전통적인 유교관료의 통치나 왕조체제를 온존시켜[中體]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 것[西用]’[각주:2]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를 배경으로 한 구미문화의 도입은 결국 봉건 통치의 동요를 막는다는 실용적인 정치적 목적을 충족하는 데서 그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구미문화의 내용을 구성하는 철학이나 사회과학 분야는 도외시되어 자연과학을 제도적으로 응용할 인재나 사회 제도적 뒷받침도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수용된 자연과학도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1.2. 변법유신

청프전쟁, 청일전쟁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인해, 단순히 기술의 도입만으로는 진정한 개혁이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등장한 것이 바로 변법유신이다. 이 시기에는 청일전쟁 패배에 대한 자각에서 서양 수용이 이루어진 만큼 우선 ‘구망’(救亡)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각주:3]

이 시기의 대표적 지식인으로는 캉유웨이[康有爲]를 들 수 있는데, 그를 중심으로 한 유신파는 변법유신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캉유웨이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공자개제고』를 저술하여 공자의 개혁가로서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한편으로,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옛 것에 의탁한 제도개혁’[托古改制]을 주장하며 공자와 중국의 전통적 요소가 서학과 완전히 들어맞고, 따라서 전통적 요소 중 개혁에 아주 적합한 것들이 수없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캉유웨이의 생각은 중학과 서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발견해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각주:4]

한편 이 시기에는 옌푸[嚴復] 등이 영국의 인식론과 함께 사회진화론을 도입하여, 기존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순환적 역사관을 단선적이고 전진적인 역사관으로 바꾸는 문화충격을 선사하기도 하였다.[각주:5]


2. 신해혁명 이후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

2.1. 신해혁명을 전후한 시기

이 당시는 청조의 분열과 열강의 이권 획득 경쟁으로 인해 중국내 모순이 정점을 달리던 시기였다. 따라서 사상가이자 정치가들은 사상보다는 정치 활동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비로소 이 시기에 이르러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가 중국에 소개되었다. 특히 이때에 도입된 사회주의는 이어 벌어지는 5․4 신문화 운동 이후 본격화되는 맑스주의 전파의 서막을 여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각주:6]


2.2. 5․4 신문화 운동과 북벌전쟁기

중국은 신해혁명 이후 표면적으로는 근대국가의 반열에 오른 것 같았으나 아직 봉건적인 경제, 정치 및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탈취한 이후부터는 존공복고(尊孔復古)의 기운마저 감돌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과학과 민주의 구호 아래 거대한 규모의 신문화 운동을 벌였다.
이 시기 후스[胡適] 등에 의해 ‘실용주의’가 도입되었으며, 후스는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백화문운동을 제창, 이후 천두슈[陳獨秀]와 루쉰[魯迅]에 의해 문학혁명운동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또한 이와 더불어 등장한 후스의 ‘전반서화론’은 1916년, 천두슈가 ‘최후의 각오가 되는 각오’를 제기하면서 전통을 반대하고 계몽을 호소하는 흐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혁명의 분위기를 타고 옛 것을 전복하며 새 것을 추구하는 일련의 흐름이 폭발한 시점을 5․4 신문화 운동기라 볼 수 있을 텐데, 이 흐름을 가장 함축적으로 집약한 구호가 바로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이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는데, 량치차오[梁啓超]․량수밍[梁漱溟]․장쥔마이[張君勱] 등은 앞서 언급한 ‘중체서용론’의 창안자인 장즈둥[張之洞]의 학설을 계승하여 중국의 ‘정신문명’ 또는 ‘동방문명’의 우월성을 제기하였다. 이후 이들은 ‘현대 신유가’의 구성 배경이 된다.[각주:7]


2.3.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문화대혁명기, 그리고 문화열

1949년 중국 본토에 맑스-레닌주의를 근본으로 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창설되면서 기존의 중국 본연의 사상이던 유학은 쇠락기를 맞게 된다. 특히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유교는 타도해야 할 봉건시대의 유물로 지목되어 다시 한 번 혹독하게 비판받는다. 그러나[각주:8] 바깥에서는 현대 신유가들에 의해 꾸준히 연구되었으며, 내부적으로도 마오쩌둥의 사후, 문화대혁명이 종결되고 개혁개방의 기치가 들리면서 리쩌허우[李澤厚] 등에 의해 유교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중공 정부 역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의 보인 중국의 낙후한 현실에 대해 각성하며 사회주의 현대화를 위한 이념적 기반을 찾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안팎의 이러한 움직임이 맞아 떨어지며 1984년경부터 유교문화와 사회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를 한데 아울러 본격적으로 논의해 보려는 움직임이 일게 되는데 이를 ‘문화열’이라 한다.
이 논의의 중심주제들은 전통, 서방을 향한 학습, 민족과 사회주의 등이며 이 주제들에 대한 관점, 방법 등의 차이에서 여러 유파가 갈라진다.[각주:9] 그 유파들은 유학부흥론, 비판계승론, 서체중용론, 철저재건론으로 나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주장들 중 사회주의와 민족을 축으로 중국적 전통과 현대화를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키려 하던 중국공산당의 마음에 든 것은 비판계승론이었다.[각주:10] 그러나 비판계승론이 학술적 입장과 논리체계를 통해 주장을 전개하는 것과 달리 당은 정치사회적 요구라는 현실인식을 기준틀로 삼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즉, 당의 문화전략은 개방을 계속해가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을 최선의 목표로 하고 있는 바, 상황에 따라 문화열의 여러 유파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일례로 그들은 개방의 부작용의 책임을 철저재건론이나 서체중용론과 같은 전반서화론자들의 몫으로 돌린다. 그리고 유학부흥론이나 비판계승론의 주장을 완충장치로 사용하고 있다.[각주:11] 하지만 전반서화론이 꼭 당의 입장에서 비판대상만은 아닌 것이, 역사의 동력이 생산력에 있음을 강조하는 서체중용론이나 서양으로부터 배울 것을 강조하는 철저재건론의 입장이 어느 부분에서는 당내 개혁론자들의 주장과 맞아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각주:12] 따라서 당은 특정 유파의 손을 완전히 들어주고 있다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결론

이상의 서술을 통해, 중국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동일한 유교문화권이었던 조선(남한)과 일본과 다르게 지속적으로 전통 사상의 저력을 활용하여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근대화의 초기에 자체적인 근대화를 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살리지 못하고 오롯이 타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근대화된 사회에서 현실을 사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중국의 저력은, 중국 사회주의의 미래가 그렇게 어둡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급속도로 진행된 개혁과 개방으로 비록 공산당이 계급정당으로서의 이미지를 상당부분 실추하였으며, 동시에 자본주의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중국 사회주의의 미래를 어둡게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중국인들에게는 오랜 기간의 혁명전쟁을 거치며 얻은 많은 투쟁경험이 있으며, 오늘날의 중국은 그로부터 얻어낸 소중한 성과라는 생각을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맑스-레닌주의를 중국전통 및 중국현실과 결합시킨 중국식 사회주의는 전통문화의 연장선 위에 있기 때문에 단순한 옮겨심기 차원을 넘어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레포트의 말미에서도 볼 수 있듯 당이, 그리고 중국인들이 문제의 초점이 되는 논의를 최대한 증폭시켜 충분한 검토를 통해 현실에 적용하고 있는 점 등은 중국이 소련이나 동유럽과는 달리 자본주의와의 대결에서 그렇게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거주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 현대의 중국이 자본주의와 같은 구미문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유교문화를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즉, 이미 중국문화에 어느 정도 녹아 있는 유교문화를 활용해 당이 자신들의 의도를 저항 없이 전달하려 한다든가, 혹은 질서와 조화와 같은 유교문화의 보수적인 측면만을 강조해 인민들에게 사회에 복무할 것을 강권한다든가 하는 의심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저자명 가나다 순)

◆ 김예호, 유교문화와 자본주의 수업자료
◆ 김교빈(1992), 문화열과 현대중국, 『현대 중국의 모색 – 문화전통과 현대화 그리고 문화열』,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논전사분과(편), 서울: 동녘
◆ 리쩌허우(1987), 『중국현대사상사론』, 김형종(역), 서울: 한길 그레이트북스, 2005
◆ 조경란(2003),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 캉유웨이에서 덩샤오핑까지』, 서울: 삼인
  1. 조경란(2003),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 캉유웨이에서 덩샤오핑까지』 (서울: 삼인), p.11 [본문으로]
  2. 김예호, 유교문화와 자본주의 수업자료, p.3 [본문으로]
  3. 조경란(2003), p.36 [본문으로]
  4. 김예호, pp.3-4 [본문으로]
  5. 김예호, p.4 [본문으로]
  6. 조경란(2003), p.41 [본문으로]
  7. 김예호, p.4 [본문으로]
  8. 중공 중화인민공화국을 말한다. [본문으로]
  9. 김교빈(1992), 문화열과 현대중국, 『현대 중국의 모색 – 문화전통과 현대화 그리고 문화열』,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논전사분과(편), (서울: 동녘), p.11 [본문으로]
  10. 김교빈, 앞 글, p.19 [본문으로]
  11. 김교빈, 앞 글, p.19 [본문으로]
  12. 김교빈, 앞 글, p.20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클라시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후훗, 아직 학점 안 나왔으니까 이거 보고 베껴서 나오는 점수에 대해서는 난 책임 못 져요.

    2011/11/03 09:26 [ ADDR : EDIT/ DEL : REPLY ]
  2. 어제 수업 듣고 안 사실인데, 이 레포트의 전제 몇 가지는 사실과 맞지 않다. 물론 일본 유교에 대해서 배우기 전이었다고는 하나, 여튼 틀린건 틀린거니까. 혹시나 검색으로 보실 분들의 주의를 요한다.

    2011/11/03 09:28 [ ADDR : EDIT/ DEL : REPLY ]

누군가 그랬다. 이기심이 없었다면 세상은 발전하지 못했을 거라고. 사람들이 사는 이유는 어떻게 보면 간단하다. 자신이 꿈꾸는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바로 그것 때문이다. '요즘은 애들이 돈만 밝힌다',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른다'며 혀를 끌끌차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내용이 어쨌거나 자신의 지향을 향해 분투하고 있음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 곰곰히 생각해본다. 과연 내 지향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을 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나는 언제나 주류에 편입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꽤 멋진 일(?) 같았고, 한동안은 스스로가 '비주류'이라 굳게 믿으며 자랑스러워도 했던 것 같은데, 요 몇 년 새 그런 생각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니 애당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참 꿋꿋하게 해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논쟁의 시작

저런 생각에 취해 있던 벌거숭이 시절이다. 친구들과 함께 잠깐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우리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자'는 결론을 낸 적이 있다. (어찌나 호기로운지!) 그런데 그 방법에 대해 이견이 났는데, 나는 '아래에서 변혁을 노래하자'고 주장했고 다른 친구는 '성 내에서 가교를 내려 성을 무너뜨리자'고 주장했다. 그 친구는 '일단 안에 들어가서 문을 여는 것이 빠르고 효율적이다'는게 논거였고, 나는 '일단 체제에 편입된 자가 문을 열어줄 거란 확신을 가질 수 없으며, 엘리트 중심보다는 인민 중심 체제를 세우는 것이 비록 느리지만 견고할 것이다'라 응수했던 것 같다. 물론 그 때의 생각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나눈지도 어언 7년이 다 되었고, 지금 생각하면 당장의 남조선 사회에서는 그 친구의 방법이라도 일단 차용하는 것이 조금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조금씩 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성문을 열겠다'는 친구들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다. 단적으로 남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그렇게 한 전례를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마이너리티를 생각하는 몇몇의 엘리트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세상이 미쳤기 때문인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한 사람의 '지사'로 기억될 뿐이지 세상을 뒤엎은 '혁명가'로 기억되지는 않고 있다.

귀찮을 때는 경험적 증거를

반면 애당초부터 아래에서 시작해 세상을 조금씩이라도 바꾸는 사람들은 많다. 전태일이 그랬고, 김진숙이 그렇고, 가깝게는 내 친구 공현이 그렇다. 함께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아, 학교의 비합리한 조치에 여러모로 이의를 제기하던 공현은 이제 어엿한 중견 활동가가 되어 책이며 강연을 다니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물론 '김상곤이라는 엘리트 관료가 말을 꺼냈기 때문에 학생인권조례라는 게 비로소 현실화 될 수 있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공현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가 일을 시작하면서 해왔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들의 활동에 의한) 맥락이 있었기 때문에 김상곤이라는 엘리트 관료가 제안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법 하다.

어쨌거나 그래서 내 경우에는 어떻냐면. 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전히 마이너리티를 추동하는 것이 근본적인 사회변혁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딛고 서 있는 맥락인데, 이것을 보면 나는 어느새 7년 전 나랑 의견을 달리 했던 친구의 길을 가고 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행동으로는 그동안 얼마나 메이저 리그에 진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 왔던가를 생각하면 부끄럽기가 짝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마이너 리그의 반란을 지지한다. 다만 내 스스로 '변혁의 주체가 되겠다'고 말을 하지 못할 뿐이다.

미증유의 기록을 세워주길

얼마 전에 7년 전의 그 친구가 사법시험에 합격해 졸업을 하고 사법연수원을 다니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녀석이 그렇게 주장하던 대로 이제 '성 안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남조선이 어쨌거나 변혁의 흐름을 가져야 한다는 내 입장에서는, 당시의 기억을 근거로 한 명의 세작이 기득권의 견고한 성 안에 들어간 것으로 여기고 있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그 때의 소신도 잊지 않고 있기를 기원한다. 미증유, 내가 그 녀석에게 기원하는 것은 미증유의 역사다.
저작자 표시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클라시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올레길을 걷다가 문득 내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 왜 중어중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썰을 풀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딱히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서나, 혹은 어디 기고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내 자신을 위해서다. 이러한 일종의 '다짐'이 필요한 이유는 - 약간 순환논법 같지만 - 내가 전공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왜 중문과에 진입했나. 누가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2학년 선배들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민망해,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던 1학년을 보낸 내게, 학기 말에 덩그러니 선택지가 주어졌다. 이제 계열생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전공에 입문해야 할텐데 어떤 전공을 선택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1학기에 촛불집회다 뭐다 일이 많아 망했던 학점을, 2학기에는 꽤 좋은 성적으로 만회할 수 있었는데 그 덕에 나는 영문과 끝에서 중문과 안정권까지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영문과를 쓰자니 떨어질까 불안했고, 국문과를 쓰자니 중학생 때 들었던 중세국어의 암울함이 싫었던 나는 그나마 관심이 있으면서도 '상위학과'로 분류된 중문과를 1순위로 적어냈고 아주 적당히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중문과를 선택한 계기다.

사람들은 내가 중문과를 다닌다 하면 "중국이 이제 슈퍼파워를 갖는다는데 잘 선택했네.", "돈 많이 벌겠다, 야." 같은, 마치 짠 것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아마도 자신이 사고해서 조합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저 몇몇 찌라시들에서 던져주는 이야기들을 미끼마냥 덮썩덮썩 문 데서 나오는 반응들일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건대, 중국어를 잘 한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건 없다. 자신이 어학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거나, 혹은 통번역으로 먹고 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중국어 하나 가지고 할 수 있는 건 없다. 어학은 기능이다. 반드시 다른 능력과 조합되어야 큰 성과를 내는 기능. 그것을 알기 때문에 당장 중문과 인원의 상당수가 경영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는게 아니던가.

물론 경영학도 기능이다. 회계원리나 원가회계, 재고에 대해 아무리 배워봐야 당장 기업은 여러분들을 CEO나 혹은 그에 준하는 연봉의 - 이 세계의 가치척도는 오로지 화폐다. 시장평균보다 높은 화폐를 취득할 수록 우리의 가치는 높아진다. - 직위로 대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중국어일텐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화인민공화국이 단일 내수시장으로서는 최대 시장이라는 경제적 패권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패권까지 거머쥐게 될 전망이라 특히나 중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역시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어는 기능일 뿐이며 누구든 시간만 투자하면 모두 구사할 수 있다. (당장 내가 듣는 초급중국어 수업만 봐도 경영학과 친구가 실력 면에서 돋보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중국어를 공부하겠다고 생각할 때에, 단순히 '남들보다 낫기 위해'라 생각하고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중어중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했다면 반드시 어학원에 다니는 심정 말고 다른 것도 필요할텐데 뭐, 남조선과 같은 상황에서 그딴건 애당초 있지도 않고 별로 요구하지도 않는 것 같다. 우린 그냥 학기당 근 4백만원 씩이나 내고 '잘 만들어진 제품입니다'를 증명하기 위한 어학원에 다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여튼 간에, 내 경우에는 별로 한국의 경제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이미 근 3년 동안 불필요한 경쟁에 노출되었고, 사실 앞으로도 그런 식의 치킨게임은 계속하고 싶지 않다. 따라서 나름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런 내게도 중국어는 역시 기능일 뿐이다. 하지만 필수적인 기능. 내게 중국어가 갖는 위치는 딱 거기까지다. 내가 하려는 일은, 영어는 기본이고 중국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역시 구사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도 모두 상당한 수준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근 10년은 하기 좋든 싫든, 어학원의 신세를 아니 질 수 없다는 거지.

이렇게 말하고 보니 중문과를 무슨 어학원 같이 서술한 느낌인데, (굳이 수습하자면) 그래도 성대 문과대에서 중문과 만한 학과는 없다. 어차피 다른 과들도 어학원인건 마찬가지니까. 게다가 여러분들이 '학문적 순수성'이나 '진리' 따위를 추구하며 철학과나 사학과같은, 돈 안되는 학과를 자원할 만한 배짱도 없을 것 아닌가. 수퍼파워에 대한 기대랄지, 구성원들의 열정을 보면 내 보기엔 중문과가 제일 낫다. 물론 가지 않은 길은 알 수가 없으니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찾아보시든가.
저작자 표시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클라시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했던 2년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었다. 남들에겐 무슨 날인가 싶겠지만, 여튼 내겐 의미가 있다. 더 이상 도망갈 데도, 피할 데도 없어졌다는 것. 그것 때문이다.

20대 초의 기억에는 빈 공간이 많다. 다양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던 나날들, 그것이 빈 공간들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들은 변화무쌍하게 이동한다. 내 경우엔 이동성이 그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빈 공간'이라 여겨지는 걸테고.

어쨌거나 어제의 소집해제와 함께, 이제는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버렸다. 반십년을 주저앉아 있던 상태에서 곧바로 길고도 먼 레이스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의지에 따라 이후에도 여전히 서 있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러기엔 내 뇌는 너무 단단하게 기성 사고방식에 절여져 있고, 더불어 내 야망도 크다.

내가 앞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움직이느냐, 멈춰 서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일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움직이느냐도. 동시에 고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고민의 시간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

아마도 소집해제일을 맞은 오늘, 후련하다는 생각과 함께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겠다.
저작자 표시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클라시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비밀댓글입니다

    2011/08/18 00:06 [ ADDR : EDIT/ DEL : REPLY ]
    • 아니, 검더리님.

      어디 계시다가 이제 나타나시는건가요!
      반갑습니다. 그리고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

      2011/08/18 00:48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