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주변사논고'는 간단히 말해 성대 주변의 건물, 길 등에 담긴 역사를 톺아보기 위한 연재물입니다. 오랫동안 준비하기는커녕, 11월 16일의 산책 과정에서 불쑥 튀어나온 프로젝트라 사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쓸거라고는 장담 못하겠습니다. 즉, 쓰기 싫으면 언제든 때려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입죠.

먼저 다룰 두 개의 주제, 성균관과 종로1가 사거리 일대는 주변인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정작 본인은 모를겁니다만, 여튼 좋은 주제를 정하도록 도와준 그 사람에게 앞 두 편은 헌정을 하도록 합니다.

이제 첫 발을 내디뎠으니,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봅시다.


아, 잘 쉬셨나요? 커피는 맛있으셨어요? 다른 서울시내 사립대학교에 비해 성균관대 앞 상권은 규모가 작은 편입니다. 아마도 더 큰 상권인 대학로가 인근이라, 그 쪽으로 집중되는 경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금 '청룡상' 앞에 계시죠? 이제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언덕 위로 찬찬히 걸음을 옮겨보시죠. 비천당을 지나면 최근에 신축한 건물인 국제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글로벌-'로 시작하는 학과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만, 이름과는 달리 애당초 별로 글로벌하지 않은 발상에서 생긴 학과들이니 뭐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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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있던 석조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600주년 기념관. 비록 시설은 현대화 되었을지도 모르나, 그 운치는 예전 석조건물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그 위 쪽으로는 이름도 위엄찬 '600주년 기념관'이 있습니다.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 성균관은 고려 성균관이 아닌 조선 성균관의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역시 이 논리를 기반으로 하여, '우리는 1398년에 개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거죠. 이를 두고 각 학교 훌리들 간 배틀이 왕왕 벌어지기도 합니다만, 정작 현재 국내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는 자기네들 역사를 60년으로 줄이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뭐... 그냥 재미로 이해해야죠. (경성제대가 참 좋은 대학교긴 했는데...)

근대화 바람 속에서의 성균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성균관대학교 설립사를 돌아봅시다. 성균관대학교가 근대적 대학으로서의 틀을 형성한 계기는 1895년의 을미개혁입니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교육이 도입되며 기존의 교육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요구되었는데, 이 때 전통 유교교육기관의 최고학부였던 성균관은 고종과 개화세력에게 고민거리가 되었죠. 성균관을 폐지하거나 근대 학문 교육기관으로 전면적으로 탈바꿈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에 내부에 경학과를 설치하여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분적으로 도입하는 절충안이 등장하게 됩니다. 「성균관관제」(1895. 7. 2, 칙령136호)과 「성균관경학과규칙」(1895. 8. 9, 학부령2호)은 이러한 배경에서 제정된 것이며, 이후에도 성균관에 대한 절충적 정책은 지속됩니다. (이런 이유로, 성균관은 온건개화파의 '동도서기'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됩니다.)

「성균관관제」 에 의해 성균관은 학부대신의 관리 하에 운영되는 것이 명시되었고, 문묘의 봉사와 경학과 설치 · 운영이 규정되었어요. 직원으로는 성균관장(1인, 주임), 교수(2인 이하, 주임 혹은 판임), 직원(2인, 판임)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관제가 마련된 지 1달 후, 「성균관경학과규칙」이 발표되어 경학과의 운영에 대한 세부내용이 정해지게 됩니다.


성균관의 근대화된 모습을 본격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은 「성균관경학과규칙」입니다. 이것의 주요내용은 교육과정, 수업연한, 학년, 입학,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교육과정은 전통적인 경학교육을 유지하면서도, 본국 및 만국역사, 지리, 산술을 부가함으로써 근대적인 교과교육을 도입하려 했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수업연한은 3년으로 하고, 1년을 2학기로 나누어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1년의 수업시수를 42주, 매주 28시간 이내로 규정하는 등 학교운영 면에서도 현재의 대학교들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이죠. 입학지원자는 20세 이상 40세 이하인 자로 하고, 입학시험을 보는 경우와 성균관장의 추천으로 입학하는 경우로 구분하였습니다. 시험은 임시시험, 정기시험, 졸업시험의 3종류로 하였는데, 임시 및 정기 시험은 이전의 성균관에서도 시행하던 것이었으나 졸업시험은 이제까지 시행되지 않았던 새로운 성격의 시험이었어요. 즉 이전에는 성균관에 학적을 두면서 과거에 합격하면 자동적으로 졸업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과거시험제도가 폐지된 당시로서는 졸업시험이라는 별도의 단계를 두고 이들의 자격을 공인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졸업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문묘관리 직원 가운데 결원이 생기면 우선적으로 충원되는 자격이 주어졌었다고 하니, 그래도 성균관을 나오면 입신양명은 하지 못해도 준정부기관에 취업은 해서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하하.

성균관, 과거의 영화와 이별하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너울대기 시작하면서, 국립대학인 성균관 역시 세파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1908년 11월에 통감부는 「성균관학칙」을 제정하여 경학 이외에 수신, 국어, 일어, 역사지리, 수학, 이과, 도화, 법제경제, 체조 등을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며 실질적으로 일제에 의한 고등보통교육기관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명실상부 국립 최고학부로서의 성균관은 이쯤에서 막을 내렸다고 보아야겠죠.

이어 식민지기인 1911년 6월 조선총독부는 「경학원규정」을 제정함으로써, 직제 및 운영에 관한 내용을 새롭게 정비하였습니다. 이 규정은 전문 17조로 된 것으로서, 경학원을 총독의 감독 하에 둔다는 것, 경학의 강의와 연구, 그리고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교화를 돕는 일[敎化裨補]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 대제학 · 부제학 · 제주 등의 직원을 두어 운영한다는 것 등을 제시하였습니다. 경학원의 소속과 설립 목적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시기의 경학원은 이미 교육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되었으며 다만 유림의 저항을 무마하거나 일제 강점기 동안 유교를 총독부 체제에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존립했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강연회와 순회 강사 파견입니다. 일례로 1915년에 경학원 사성 이인직('혈의 누' 작가)은 이원군 순회강연에서 '일선동화'를 주장하기도 하였었죠. 총독부 정책을 유교적 언어로 홍보하는 역할을 맡은 계간 《경학원잡지》도 발행하였는데, 이 잡지는 경학에 대한 논설 외에 일본인의 논설, 정책 해설과 법령, 시국에 대한 성명을 게재했으니 할 말은 다 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이후 1930년에 경학원 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되었다가 다시 '명륜전문학원'으로 개편되었고, 1939년에는 '명륜연성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42년 3월 17일에 '명륜전문학교'란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에서 인가를 받았으나, 2년이 채 되지 못한 1943년 12월 31일자로 폐교되기에 이릅니다.

▲ 1942-43년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 <명륜전문학교 건축평면도>. 본관과 강당, 도서관, 교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관과 뒤쪽의 교사는 ㄷ자 모양의 건물이다. 학교는 본관과 교사가 병렬 배치되고 강당과 도서관은 본관의 옆쪽으로 배치되는 전형적인 관학교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뒤쪽 교사의 평면도에는 중앙과 좌측에 계단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어 이층 건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국가기록원)


성균관, 광복과 함께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와 조우하다

1945년 8월 15일, 독일 · 이탈리아와 함께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일본이 패망선언을 하며 식민지 조선에도 광복이 닥칩니다. 물론 잘 아시겠다시피, 일본을 접수한 미 태평양 방면 육군사령부가 식민지 조선에도 들어와 3년간 군정을 실시하게 되죠. 군정은 조선인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한정적으로 일제강점 이전의 모습을 찾는 작업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에 1945년 10월 17일, 군정법령 제15호 「제국대학명칭변경」[각주:1]이 발효되며 경학원은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 전인 9월에는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게 되죠.

이어 11월에는 전국유림대회가 열려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 대학 기성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 그 이름도 찬란한 심산 김창숙 선생님이 대표로 취임하기에 이릅니다.


이러던 중에 1946년 9월, 재단법인 학린사의 이사장이던 학봉 이석구 선생님이 거대한 토지자산[각주:2]을 포함한 재단 전체를 희사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꾸려졌으며, 드디어 문교부로부터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받기에 이릅니다. 당시 성균관대학은 전문부(철정과 · 경사과)와 예과로 편성되었으며 초대 학장과 재단이사장으로 각각 김창숙 선생님과 조동식 선생님[각주:3]이 취임합니다. 이후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김창숙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며 늘상 이승만과 반대되는 길을 걸어왔고 이런 관계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며 국가교육정책의 수립에 있어 김창숙 선생이 학장으로 있던 성균관대학이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후 권력과 유착하던 유도회 인사 몇이 나서 유도회로부터 김창숙 선생을 비롯한 정통파를 축출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후 1947년 9월에는 학부 승격을 전제로 전문부와 예과 신입생 모집을 중지하였으며, 1948년 7월에 문학부와 정경학부의 2개학부가 설치됩니다. 당시 동양철학과 · 문학과(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불문학전공) · 사학과가 문학부에 속해 있었고, 법률학과 · 정치학과 · 경제학과가 정경학부에 속해 있었습니다. (문과대학의 몇 개 학과 친구들이 콧대가 높길래, 뭘 믿고 저러나 싶었는데 이래서 그랬군요.)

1950년의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연합군의 수도탈환 즈음에 학교에 화재가 발생하여 1,500명을 수용하던 교사 전체와 7세기에 걸쳐 소장해온 7만여 권의 서적들이 회진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이에 성균관대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고등학교 안에 임시 천막교사를 설치하여 강학하다가 다시 부산시 동대신동의 임시교사로 전전하게 됩니다.


휴전 직전인 1953년 2월에, 성균관대는 문리과대학과 법정대학, 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을 신설하고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의 승격 인가를 얻습니다. 문리과대학에는 기존의 문학부에 속해 있던 동양철학과 · 국문학과 · 영문학과 · 불문학과 · 사학과와 함께 교육학과와 생물학과 · 화학과가 새로 속하게 되었고, 법정대학은 기존의 정경학부에 속해 있던 3개 학과가 속하게 됩니다.[각주:4] 이렇게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성균관대의 초대 총장에는 이전부터 성균관대를 이끌어온 심산 선생님이 다시 취임(1953년 4월)하게 되죠. 이어 1953년 6월에는 미군정법령 제194호에 의거, 각도 향교재단의 재산을 갹출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재단법인 성균관과 병합, 재단이 확충되기에 이릅니다.

1953년 9월, 휴전과 함께 환도하여 폐허가 된 교사를 정리하고 가교사를 세워 일단 개강하였다가 1954년 4월에 석조본관 건축공사를 재착공하고 가교사 185평을 준공하는 등 본격적인 캠퍼스의 모양새를 갖춰나가게 됩니다. 건물 뿐만 아니라, 다루는 학문의 영역에서도 점차 대학의 모습을 찾아가는데 1954년 2월에는 문리과대학에 수학과 · 심리학과 · 물리학과가, 55년에는 중어중문학과가, 58년에는 법정대학에 상학과가, 59년에는 문리과대학에 독어독문학과와 법정대학에 경영학과가 개설됩니다. (중요한 것은 중어중문학과가 55년에 개설되었다는 겁니다.)


성균관대의 역사는 여기까지입니다. 1965년부터 삼성문화재단이 본교의 운영을 맡으면서는 사실 '삼성재단의 역사'인지라 더 이상 서술하지 않겠습니다. 간략히 말씀드리면 수원으로의 캠퍼스 이전설[각주:5]과 함께 삼성 특유의 '자기만 선진적'인 운영행태 등으로 잠깐 삼성과 결별(1977년 삼성문화재단 운영 포기)을 했다가, 도투락 만두 만들던 봉명재단과 붙었다가 다시 삼성과 붙었다가 뭐 하는 역사가 이후에 펼쳐집니다만 그다지 뭐 이 당시의 역사는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그냥 넘깁니다. 삼성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빼놓고 싶지 않은 역사겠지만, 비전 2020이다 뭐다 때문에 강제로 없어지게 생긴 문과대학 학생으로서 '삼성재단의 역사'에는 별 흥미가 없는지라 말입니다. 졸업생들이 모인 성대사랑이라는 데에 가면 삼성재단을 찬양하는 글들이 많으니, 구글에서 검색해 들어가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 되겠습니다.

아스라이 흩어져버린 성균의 기개

마지막으로 지난번 성균관 편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성균(成均)'의 뜻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끝을 맺으려 합니다.[각주:6] 성균관의 '성균'을 풀어쓰면 아래와 같습니다.[각주:7]

人材之未就(성인재지미취)[각주:8], 風俗之不齊(균풍속지부제)[각주:9]

"인재로서 아직 성취되지 못한 것을 완성하게 하고, 민중의 생활이나 문화가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요즘 식으로 풀어 말하면, "전인교육"과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옛날에, 교육과 교육받은 자(well-educated people)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념은 시대를 앞선 선진적인 발상이라고, 그리고 세계 역사 속에서도 흔치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성균(成均)의 '成'은 인재를 완성시킨다[成人材]는 '수기(修己)'의 목표를, '均'은 풍속을 고르게 한다[均風俗]는 '치인(治人)'의 목표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잘 아시겠다시피, '수기'와 '치인'은 성균관대의 건학이념이기도 하지요.

이에 대한 설명은 1954년 심산 선생님이 성균 제5호에 쓰신 원고의 말미에도 잘 드러납니다.

"우리 성균의 건아들이 성균의 유래인 '성진재지미취 균풍속지부제'의 진의를 파악하여 전통에 빛나는 우리 학원에서 굳세고 참되게 자아 완성을 면려(힘쓰게)하여 국가 민족의 부흥과 인류복지의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성대사랑에 올라온 이야기들을 보니, 80년대에 대학에 입학을 하면 선배들이 바로 이 내용들을 말해주며 성균관의 의미를 새기라는 말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80년대 총장실에 저 내용(成人材之未就 均風俗之不齊 館 = '성균관')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고 하죠. 검색을 하다보니, 어떤 어르신께서 "50년대 말에 귀교(성균관대 - 옮긴이 주)를 찾았을 때, 정문 뒤 양 옆으로 장승같은 두 개의 기둥이 서 있었고 그 기둥에 각각 '성인재지미취, 균풍속지부제'란 글귀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는 이야기[각주:10]를 남겨두셨네요. 이 분은 이것이 '대학'이란 것의 사명을 간명하게 압축한 글귀라고 하셨던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학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찾아보기는 크게 어렵다는 사실입니다.[각주:11]

조금 슬픈 이야기입니다만, 이 사상과의 단절이 성균관대의 변화를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더 이상 600년 전통의 성균관을 다니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단순히 숫자 '600'을 자랑스러워 하는 찌질한 숫자놀음에나 낄 것이 아니라 그 '600'이란 숫자가 주는 역사와 철학의 무게를 고민하고 계승할 일입니다. 물론 지금의 학교에게는 그 모든 것이 버겁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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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뒤로는 창덕궁 후원이 보인다. '예전에 저기 많이 넘어갔다'는 교수님의 말을, 누군가에게 전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사람이 '저기가 어디냐?'고 묻길래 얼버무렸었는데, 지도를 보니 창덕궁 후원 어디메쯤 되는 모양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주변사논고 주제 2. '종로1가 사거리' 편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날씨가 다시 추워졌는데 몸 관리 잘하셔서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변사논고 주제 1.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편 끝.>

[어디까지 왔나?]
성균관 - 성균관대학교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편 참고문헌


  1.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겸 미국육군소장 A. B. 아놀드의 명의로 발표된 군정법령. 제1조는 경성제대를 서울대학으로 변경한다는 내용을, 제2조는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번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2. 1940년 3월 3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석구 선생은 1940년 2월 12일 “환갑잔치보다는 사업이 중하다.”고 아들 능우(能雨 : 문학박사,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서리 역임)에게 훈계하고 환갑잔치까지 거두면서 30만 평의 논을 매각, 환갑기념사업으로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를 설립하였다고 전합니다. [본문으로]
  3. 재밌는건 이 조동식 선생과 앞서 언급했던 이석구 선생의 후손들이 동덕여대의 '주인' 자리를 놓고 최근까지 법정싸움을 했다는 겁니다. 2003년 비리로 동덕여대 재단에서 퇴출된 조 선생의 후손들이 정이사 추천을 통해 재단복귀를 꾀하던 과정에서, 조동식 선생이 동덕여대의 설립자라고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를 알게 된 이석구 선생의 손자가 법원에 '설립자는 이석구 선생이니 동덕여대의 모든 문서에서 설립자를 조동식 선생에서 이석구 선생으로 바꿔달라'는 소를 제기했던 거죠. 이 소는 2011년 7월, 재판부가 '이석구가 설립자임!'이라 판결을 내리며 일단락 되긴 했습니다. 어쨌거나 현세의 복 못지 않게 내세의 복도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본문으로]
  4. 1951년 12월, 개정된 교육법령에 따라 기존의 문학부와 정경학부가 폐지되고 학과제로 변경되었으나 서술상 편의를 위해 개념적으로 차용합니다. [본문으로]
  5. 삼성재단이 77년에 성균관대의 운영을 포기하면서 수원으로의 캠퍼스 이전 계획 역시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대신 자연과학캠퍼스와 인문사회캠퍼스가 각각 수원 율전동과 서울 명륜동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이 자주 묻는 왜 '성균관대가 두 개냐'에 대한 답이 되겠군요. [본문으로]
  6. 지난 편의 글에 덧글로 여러 중요한 지점을 꼬집어 주신 'ㅁㄷ'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본문으로]
  7. 어딘가를 보니 음을 조율한다는 뜻이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본문으로]
  8. 구글에서 검색하다보니, 중국 쪽에서는 재목 재(材) 대신 재주 재(才)를 쓰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본문으로]
  9. 사실 이 뜻을 어렵게 생각했는데, 이미 '성균관 스캔들'에서 금등지사를 찾는 암호로서 김윤희의 아비인 김승헌이 정조에게 남긴 사직상소문에도 등장했다더군요. [본문으로]
  10. 서동오, '감동의 편지한장', 네이버 블로그, 2010년 9월 12일 작성. 2011년 11월 20일 확인. http://blog.naver.com/wind0631/150093735308 [본문으로]
  11. 졸지에 심산 선생의 동상도 호젓한 곳(!)으로 밀려 있는데, 무얼 더 말하겠습니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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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클라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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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주변사논고'는 간단히 말해 성대 주변의 건물, 길 등에 담긴 역사를 톺아보기 위한 연재물입니다. 오랫동안 준비하기는커녕, 11월 16일의 산책 과정에서 불쑥 튀어나온 프로젝트라 사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쓸거라고는 장담 못하겠습니다. 즉, 쓰기 싫으면 언제든 때려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입죠. (...) 물론 주제는 벌써 열 한 개나 생각해뒀습니다만, 역시 그게 언제 글로 화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다섯 개만 미리 적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물론 변동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1주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 제2주제 종로1가 사거리 일대 / 제3주제 대학로 일대 / 제4주제 백악산과 서울성곽, 그리고 김신조 / 제5주제 낙원시장 일대

1편과 2편의 주제는 주변인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정작 본인은 모를겁니다만, 여튼 좋은 주제를 정하도록 도와준 그 사람에게 앞 두 편은 헌정을 하도록 합니다. (역시 이런건 생색을 내는 겁니다만, 문제는 자기가 뭘 도와줬는지 모르니까 읽지도 않을겁니다.)

자, 그럼 이제 떠나볼까요?

성균관의 역사는 어디에 맥을 닿느냐에 따라 달리 읽힐 수도 있겠습니다. '성균'이란 이름이 최고학부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을 연원으로 본다면 1289년 고려 충렬왕 대부터라고 볼 수도 있겠고요. 현 위치를 기점으로 생각한다면 조선왕조에서 성균관을 처음 설치한 1398년을 연원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균관대학교의 경우에는 후자를 따라 개교년을 1398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조에서 성균관은 어떤 역할을 했느냐. 이 곳은 일종의 국립대학교이자, 왕조의 권위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씽크탱크의 역할을 했습니다. 기능적으로는 소과에 급제한 유생들이 대과를 준비하기 위해 들어오는 일종의 기숙형 관료양성소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잠시 딴 이야기를 하죠. 모두 조선의 관료등용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는 대강 아실 것입니다. 생원이니, 진사니 하는 호칭은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거 왜, 제가 막 한 두 번 불렀던 조영남 번안곡 '최진사 댁 셋째 딸'의 그 진사 말입니다. 이 호칭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 생원시와 진사시가 바로 소과(小科)입니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식년(式年, 3년)마다 치러졌는데[각주:1] 생원시는 사서오경을, 진사시는 문예창작의 재능을 물었습니다. 이 소과에 합격을 하면, 대망의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물론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아도 대과를 치를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대과 합격인원이 적었고 (33명), 그마저도 대부분 성균관 출신 유생들이 합격했기에 소과 합격자들이 성균관에 입학해 대과 준비를 하는 것은 일종의 '왕도'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잖아요? 법대나 법학원 안 다녀도 사법시험에 응시하거나 합격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법학과에 진학하거나 법학원에 등록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잖아요. 이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입니다. 우리는 이 많은 건물 중 단 몇 개만을 보고 지나갑니다. (출처 : 성균관)


여튼, 이를 위해 성균관에는 기숙시설인 서재와 동재가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균관대학교의 유학동양학부 학생들이 선배들을 흠모하여 실제로 이 서재와 동재에서 기거하는 기개를 펼쳤다고 합니다. 물론 성균관이 (일종의) 성역화가 되면서 이들을 쫓아냈고, 뭐 이 과정에서 알력다툼이 있었다고는 합니다만 옛날 이야기니까요. 최준식 교수가 작성한 네이버캐스트 '성균관' 편[각주:2]을 보면, 이 동재와 서재의 방이 다 합쳐 총 30개[각주:3]라 어떻게 200명이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한 언급이 있네요. 실제로 가보시면 알겠지만 방 크기가 크지도 않은지라 - 자물쇠가 한 쪽만 채워져 있어 마음만 먹으신다면, 그리고 들키지만 않으신다면 열어 보실 수도, 들어가 보실 수도 있습니다 - 저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긴 했습니다. 원래 스킨십이 많으면 애정이 싹트는 건데, 그렇게 좁은 방에 여러 명을 넣었으니... 아마 이런 데서 성균관 스캔들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망상을 잠시...

서재와 동재 앞에는 돌단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는 유생들이 스스로의 나태함을 꾸짖기 위해 회초리를 들었던 곳이라고 하죠. 성균관 유생들은 의식주부터 모든 것을 국가에서 대주는, 일종의 국비장학생인지라 한 달에 30번 이상씩은 꼭 시험을 봤다고 합니다. 1년에 단 네 차례만 시험을 봐도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게 시험인데, 그걸 한 달에 서른 번씩이나 봤다니... 이런 데이터들을 모아 일정 기준에 충족하지 못하는 유생은 성균관에서 퇴출을 시켰다고 하는데, 이 기준을 찾기가 어렵네요. ('성균관 퇴출'이라는 키워드를 구글에 넣으면 맨 박민영과 박유천, 전태수의 이름만 나오니... -_-;;;)

서재와 동재 이야기를 했으니까, 성균관의 다른 건물 이야기도 해볼까요? 성균관에서는 학문수양 말고도 선현을 모시는 일도 했는데, 그 중심건물이 바로 대성전입니다. 대성전에는 공자 선생님을 비롯한 39명(공자와 4성, 공문 10철, 송조 6현, 한국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양반들(!)에게는 매년 2월과 8월에 '석전제' 혹은 '문묘제'라는 제사를 올립니다. 여기서 연주하는 음악이 바로 '문묘 제례악'인데, 재밌는건 이 문묘 제례악이 정작 공자 선생님의 고향인 중국에서는 청조 말의 혼란과 공산주의 국가의 수립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잊혀진 유산이란 겁니다. 유교문화의 변방국이었던 일본에 이런게 있었을 리는 없고요. 그러니까 이 문묘 제례악의 원형은 유일하게 남한에만 남아 있는 거죠.

대성전 앞을 볼까요? 세 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와 다섯 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가 좌우로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아마도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고, 후대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져다 붙인 이야기겠지만 참으로 공교로운 가지의 수 때문에 이 두 나무는 각각 '삼강목'과 '오륜목'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수종은 측백나무인데, 올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어 유교에서는 소나무와 함께 군자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제 발걸음을 옮겨 대성전 뒤로 가보죠. 대성전 뒤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수령이 벌써 500년은 되었다(1519년에 심었다고 합니다)고 하는데, 공자 선생님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종종 은행나무 밑에 좌판을 깔으셨다고 해서 유교를 가르치는 국립학교(성균관, 향교)에는 꼭 이 은행나무를 심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천연기념물로 등록된 나무들이 암나무인데 반해, 이 나무의 경우엔 수나무입니다. 사실 가을이 되면, 은행 녀석들도 나름 종족번식을 해야겠기에 신나게 은행을 주렁주렁 달고 떨어뜨리는데 만약 이 나무가 암나무였다면 대성전 안팎은 온통 구린내로 진동했겠죠. 그러니까 4년을 다녀야 하는 제 입장에서는, 이들이 수나무인게 무척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묘목일 때 암나무인지 수나무인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각주:4])

은행나무의 건너에는 명륜당이 있습니다. 명륜당은 성균관에 기거하는 모든 유생들에게 강의를 하던 일종의 강당으로서, 간혹 이곳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도 했습니다. 성균관대학교와 성균관이 위치한 명륜동이란 이름의 어원이 되는 건물이기도 하고요. 한자를 풀어보면 밝을 명(明)에 도리 륜(倫)으로, '도리를 밝히라'는 쯤의 뜻이 되는데 성균관의 정치-사회적 위치와 참으로 잘 맞는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 이제 명륜당 뒷편으로 돌아가보면 한국 대학도서관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존경각'이 있습니다. 성균관 존경각에는 한때 수 만 권의 유학 관련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국운이 기울던 조선 후기부터 장서 규모가 줄기 시작해서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도서를 전부 이관했습니다. 뒤이어 이야기 할 비천당과 함께, 존경각은 성균관 개설 당시에 건축된 것은 아니며 성종 6년(1475)에 한명회의 건의로 건립된 것입니다. 성종이 하사한 책 1만 권과 함께 개관한 성균관은 중종 9년(1514)에 소실되었다가 복원, 이후 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하고, 영조 48년(1772)에 개수하였습니다. 기본 장서는 사서오경 · 제자백가 등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 서적 위주였으며, 불교 · 도가나 기술 서적은 '잡서'로 취급되어 소장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존경각의 우측에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육일각'이 있습니다. 육일각은 영조 19년(1743)에 건립되었으며, 성균관 내에 있는 활과 화살,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각종기구를 보관하였다. 고대 유교에서는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숭상하였기 때문에 육례(六藝 : 禮·樂·射·御·書·數) 중에 하나인 활쏘기[射]를 선비들의 기본소양으로 생각하여 유생들에게 장려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죠. 왜 성균관 스캔들에서도 4인방이 열심히 활쏘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그럼 이제 존경각 왼쪽으로 난 입구를 통해 나가볼까요? 예전에는 흙으로 덮혀 있었을 법하나, 이제는 아스팔트로 덮힌 평지가 나오고 다소 뜬금없이 서 있는 '비천당'을 발견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비천당 역시 성종 때 건립되었으며 과거시험장으로 쓰였다고 하니 비천당 앞의 너른 마당이 왜 존재하는지 알 것도 같지요.

자, 이제 성균관 구경은 다 한 듯 싶습니다. 이제 발걸음을 언덕으로 옮겨 성균관대학교로 가보아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좀 쉬었다 가죠. 쉬기 전에... 성균관대학교의 정문으로 들어와 바로 왼 편에,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는걸 보셨나요? 네, 눈이 좋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것이 바로 영조가 세운 그 유명한 '탕평비'입니다. 정치를 할 관료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던 만큼, 탕평의 도를 제1국정지표로 삼았던 영조가 탕평비 건립에서 이 곳을 빼놓을 수는 없었겠죠. 아, 마침 탕평비 뒤쪽으로 쉴 만한 공간도 있네요.[각주:5] 다시 정문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성균관대 학우들이 '청룡상 있는 데'라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 잠깐 커피 한 잔 하셨다가 슬슬 성균관대 쪽으로 시선을 옮겨봅시다.

성균관대학교 편으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어디까지 왔나?]
성균관
  1. 물론 이외에 국가에 큰 경사가 있는 것을 기념해 치뤄진 증광별시도 있습니다. [본문으로]
  2. 최준석, '성균관'. <네이버캐스트>, NHN Corp., 2010년 7월 29일 작성. 2011년 11월 16일 확인. [본문으로]
  3. 하지만 성균관 측이 제시한 수를 보면 28개입니다. 최준식 교수는 직접 세 보았다고 하는데, 아마 두 개의 방은 방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요. [본문으로]
  4. 국립산림과학원의 2010년도 3월 4일자 답변. 네이버 지식IN에서 재인용.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105&docId=105603507&qb=66yY66qpIOyVlOyImCDqtazrtoQ=&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VgY4c5Y7uRssvvkUA0ssc--021788&sid=TsTvF5DPxE4AAGY3THI [본문으로]
  5. 정문 왼 편에 있는 것은 하마비로 밝혀졌습니다. 탕평비는 성균관 안 쪽에 존재하더군요. (2011년 11월 21일 작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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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클라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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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ㅁㄷ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만큼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을 것 같아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을 말씀드립니다. ^^

    일본은 유교문화의 변방국이었는가, 문묘제례악의 원형은 남한에만 남아 있는가에 대해서입니다. "유교문화"가 지시하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는 부분입니다. 위 글의 문맥을 살펴 "유교문화"를 '주자학과 연관된 문화'라 한다면 일본이 변방국이겠지요. 하지만 조선 후기 한반도에서 주자학이 갖는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당시 조선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변방국이 됩니다. "변방국"이란 말이 따로 필요가 없게 되지요. 물론 필자께서는 "유교문화"를 주자학에 국한시켜 쓴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 비교를 해보면 일본은 결코 유교문화의 변방국이라 할 수 없습니다. "유교--여기에선 '유학'이 마땅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를 가르치는 국립학교"에 꼭 은행나무를 심는다는 점을 언급하셨는데, 일본 東京大學 교표(http://www.u-tokyo.ac.jp/files/images/logo.gif)가 은행잎인 점은 우연이 아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문묘제례악의 원형"은 남한을 비롯하여(북녘에도 남아있을 법 하지만 제가 지금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ㅎ) 일본, 타이완, 베트남 등 유교문화의 영향이 미친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문묘제례악은 조선 세종 때 박연이 周나라의 규범대로 만든 雅樂이 전승되어 내려온 음악입니다. (박연이 周나라의 음악을 들어봤을리는 없고 문헌을 보고 만들었을텐데, 일단 지금은 이것을 "원형"이라 합시다.) 이 아악이 바로 문묘제례악의 원형이고 유교문화와 함께 각지로 전파되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가을 대성전이야 안가면 그만이지만, 가을비 내리는 대성로는 ㅋㅋ
    또 여담입니다만, 아무도 성균관의 成均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하지 않더군요. 성균관대학교 편에 기대해봅니다~

    2011/11/20 05:02 [ ADDR : EDIT/ DEL : REPLY ]
    • 장문의 덧글 감사합니다. (덧글이 하나도 없어서 약간 섭섭했는데, 이렇게 달아주셔서 감개무량합니다 ㅠㅠ) 역시나 쓰면서 약간 '아리까리' 했던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지적해주셨네요.

      말씀을 듣고 조금 찾아봤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문묘제례악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아악'의 영향은 다른 유교문화권에도 남아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저 문장에서의 '문묘제례악의 원형'이란 문묘제례악의 '원래 모습'이란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만, 박연이 상고시대의 음악을 직접 듣고 쓰지는 않았을테니 저 말도 엄밀히 말해서는 틀렸다고 해야겠네요. :)

      일본이 유학의 변방국이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저도 공부가 짧아 조금 망설였던 부분으로 수업시간에 들은 표현을 비판적 검토없이 가져다 쓴 것입니다. 다만 일본의 경우에는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유교문화를 정신문화의 축으로서 가지고 갔다기 보다는 그네들의 전통문화에 유교문화를 흡수 - 그나마도 유교문화가 중심부로 끌려 나온 것은 대정봉환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사용 - 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가을비 내리는 대성로는 성대 다니는 사람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입니다.

      성균의 어원에 대해서는 덕분에 찾아보았습니다. 성균관대학교 편에 꼭 넣겠습니다.

      2011/11/20 11:56 [ ADDR : EDIT/ DEL ]